십자군과 동서교회의 애증(再)

2012. 12. 14. 14:16가톨릭세상보기

기독교인으로서 십자군 운동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한 일로 보입니다.

기독교의 탈을 쓴 이단세력들은 언제나 기독교를 비방하기 앞서 기독교의 잔혹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과장과 거짓된 진술로 교회를 모독하기 때문에
과연 십자군이란 왜 일어났으며 그 당시의 정치사회문화의 형태는 어떠한지를 알아 보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특히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열은
흔히 말하듯 1054년도에 고착이 된 것이 아니라 100년이 더 지난 후
제4차 십자군의 만행에 의해서 그 이후 고착이 된 것입니다.
이 글은 십자군 시대가 어떠하였는지와 서방교회(로마가톨릭교회)와 정교회의 분열고착의 이유를 알아보기 위하여 제가 "천주교주교회의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을 재 게시합니다.

개신교 형제들이 반기독교 세력의 음해담에 속지않고
오히려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 글을 쓰게되었습니다.
(물론 우리 형제자매님들도 반기독교세력이 십자군에 대하여 엉뚱하게 주장하며 교회를 욕보이고자 함에 속지않도록 이 글을 썼음에 물론이구요)
 
참고(보충) 1
이 글은 "십자군 전쟁, 조르주타르 지음 시공사중세문화사 학원사, 서광사의 중세사"를 특히 중심적으로 읽고 장리 요약 한 것입니다. 서광사 중세사는 대학때 공부한 교과서인데 졸업후에도 거듭 읽었고
중세문화사는 형들과 누나들이 대학 공부할 때 셋트로 구입한 책인데 서재에 남겨져 있어 그 책도 즐겨읽었습니다.
조르주타르의 저서 십자군 전쟁은 역사적 자료들을 충실히 제시하며 집필된 것으로  십자군 전쟁에 대하여 비교적 중립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었다는 평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군에 대한 책들을 몇권 읽어본 결과 조르주타르에 대한 십자군 전쟁에 대한 평가에 저도 동의합니다.


1. 십자군이란 용어는 근자에 생긴용어이며 원래의 말은
<십자가의 표식을 단 자들>입니다. 그러나 편의상 십자군이란 용어를 사용하겠습니다.
십자군이 이루어진 원인, 십자군의 성격, 그리고 시대상황만 좀 설명하여 십자군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4차 십자군 운동은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사건으로 이 후 교회가 동서로 완전히 분열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약탈과 함락이 자행된사건내막~~@@을 서술하면서 마치겠습니다.

2.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반 2세는 동로마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요청에 따라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소집.
우르반 교황은 1054년 이래 소원하였던 콘스탄티노플 교회와의 화해를 위하여 기쁘게 이 제의를 수락하였다.

1) 그 당시 전후의 시대 상황
632년 마호멧이 죽은 후 얼마지나지 않아 이슬람의 세력은 당대 기독교 지역의 3/4안팎을 차지 이슬람화 시켰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교회들은 거의 멸망을 당하였고,

유럽에서도 이베리아반도(스페인 포르투칼)는 이슬람의 식민통치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서유럽은 동로마 즉 콘스탄티노플제국이 이슬람을 철옹성처럼 가로막은채 위용을 떨치고 있어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뜻하지않은 동로마(콘스탄티노플)황제의 요청
즉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지배하게 놓이게 되어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가 방해받으며 신자들의 안전이 위태로움을 호소.

2) 그레고리오7세 교황은 이미 이슬람에 빼앗긴 지역을 탈환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독일 황제 하인리히4세와 개혁투쟁을 하는 바람에 실현시키지 못함
(===>독일 황제는 성직 매매(성직 매매로 서임돤 주교들을 제국 주교라 함)를 하였는데
교황은 성직자를 아무리 왕이라 하여도 평신도인만큼 황제에 의해 성직권이 유린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황제와 투쟁을 벌림.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의 십자군 파병은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음) ---> 사제의 독신제가 이루어짐.

3) 십자군 운동의 성격

- 십자군 운동은 전쟁이 아니고 순례이다. 그러므로 어깨에는 십자가를 달아 순례자임을 표시할 것.
- 십자가 선서를 한 자들은 무장을 하였다(이러한 무장은 중세 순례객들에 있어서는 정당한 것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순례비용을 달고 다닌 순례자들의 순례도중 날강도들이 득실거려 자신들을 보호하기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성지회복과 기독교도의 해방을 함께 추구하는 이 운동에서야~~)
- 십자군 순례 운동의 최종 목표는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성당의 참배”에 있다.
그러므로 이 십자군 순례운동에 가입하고자 하면 선서를 하여야 한다.
- 이러한 서약은 교황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것이었다.

- 그런데 십자군을 실질적으로 통솔하는 “총지휘관”은 없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통솔할 뿐이었으며 혈연, 영주관계 등의 동인에 의하여 자연히 그룹별 집단별로 지도자(지휘관)에 의하여 통솔되어왔다.
총지휘관이란 것이 있었으나 그것은 명예직이었으며 로마에 계신 교황이라도 십자군을 통솔할 수 없었다.
- 십자군의 무리 안에는 교황 특사가 포함되어 있어 군종신부의 역할을 하였다.
- 십자군 운동은 은총과 회개의 순례였으며
특히 성지와 성지로 가는 길목에는 이슬람이라는 적이 있었으므로 군사력이 있는 자들만이 선서를 하고 운동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순례도중 금식기도 등을 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운동에 당연히 부녀자들과 아이들도 몰려들었으나 교황은 이러한 순례에 이들이 선서하는 것을 금하였다. 대신 고향에 남아서 십자군의 순례자들을 위해서 기도와 헌금, 금식 등으로 도우라 하였다.

===>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들이 부랑자들이나 할 일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 거짓말이다.
당대의 유럽의 쟁쟁한 왕들 이를테면 영국의 사자 왕이라 불리우는 <리차드 왕> 프랑스의 <성왕 루이> 등등의 유명한 왕들 유명하지 않은 왕들 그리고 각지의 봉건 영주들이 순수한 신앙심으로 십자군 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성지를 이슬람이 유린하는 것을 막고
예수 성묘성당에서 참배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성묘성당에서 참배하도록 할 것이며 이슬람의 노예로 사는 동방의 기독교인들을 구원하여야 한다는 신념이
십자군 순례의 근본 목적이었다.

===>
“십자군은 당대 유럽의 인구 증가로 인하여 더 큰 땅이 필요로 하였기에 일어난 것이다” 라는 주장도 당대의 역사를 분석한 결과 거짓말이다.

1100년도 전후의 시대는 유럽의 역사는
영국이 프랑스 일부지역을 점령한 시대였으며 당연히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은 서로가 황실의 적통이라고 우기며 전쟁을 벌렸던 시기였음.
또한 스페인과 폴투칼은 이슬람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이태리의 제노아나 베네치아 공국들은 이미 유럽에서 탄탄한 부를 가지고 있는 소국들이었다.
다른 소국의 왕(영주)들 역시 그리스도 신심에 의하여 군대를 몰고 십자군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모여서도 총지휘관의 지휘권이 없는 수천 수만을 이루어었고 이는 신앙심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순례자겸 군사들이라는 특징을 가졌으며 이들 목적은 오직 박해받는 동방의 기독교인들과 유린당한 예루살렘의 성묘성당을 회복하고
그 성당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참배”하기 위하여 모였던 것임.
그리하여 여기에 참가하고자 하면 선서를 하여야 했던 것임.

이렇게 수천 수만명이 대행진(순례)을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을 경우
그들이 먹을 음식과 순례비용들은 엄청났을 것임.

이러한 비용은 당대 유럽의 부유한 공국에서 빌려주기도 하였으며 비용을 보증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할 일없는 자들이 혹은 점령할 땅을 차지하고자 부랑인들이 떼거리로 우왕좌왕하였다면 거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누가 차용해 줄 것이며
교황이 전체 유럽에 호소를 하면서 헌금을 모금한다 하여 헌금이 모금되었겠는가???

4) 당대의 전쟁의 상황
당대 전쟁은 대개가 수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그 비용 충당은 전쟁에서 이겼을 경우

점령지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동안 전쟁을 할 수 있도록 빚을 내 준 이웃 영주들이나 소국들에게 수행한 전쟁 자금을 갚았으며,
또한 패배하여 포로가 된 영주들에게는 큰 몸값을 받고 풀어주기도 한 것이 당대 유럽의 정상적인 관습이었다.
더욱이 기사도와 그리스도교 정신은 전쟁 중이라도 유부녀와 아이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것을 어길 때에는 여지없이 파문이 되는 벌을 받았다.

그러므로 십자군이 약탈을 일삼았다라는 말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 보면 정당한 표현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당연히 점령한 지역의 재산은 점령자들이 것이었으며 그 재산으로 전쟁을 수행하느라 빚을 진 것을 갚아야 하였으며
또한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는 여행비로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 지역을 점령한 이슬람에 의해 더욱 잔혹하게 실시되었다.
이슬람에게 패한 기독교 지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자는 모두 살육을 당하였으며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생겨나고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당대 성행하였던 기독교의 전 지역의 3/4 이상이 이슬람화된 것이 그 증거이기도 하였음.

5) 당대 유럽은 동방의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서방 끝 지역의 기독교인들 즉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르투칼)에서도 이슬람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교황은 스페인 포르투칼 지역의 신자들에게는 동방의 기독교인을 위한 십자군 운동 즉 성묘성당의 참배를 허가하지 않았다.
십자군 운동은 동방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받는 서방의 끝에도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6)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지역감정

십자군은 같은 기독교도의 순례자라는 의미에서 뭉쳤으나 속한 나라에 따라 지역감정이 생겼으며 이태리, 독일에 속하는 신자들과 프랑스에 속하는 신자들 사이에 지역 감정이 조성되어 있었음.
이러한 감정은 때로는 대단히 큰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 제1차 원정때(1095년 이후)

당대 신흥강국인 이슬람 투르만국에 의하여 분열상에 있던 십자군 중
프랑스인들이 귀국을 하자 대열이 흐트러진 이태리, 독일 그룹의 십자군들은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이들 중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가 살육 당하였다.

- 한마디로 십자군은 순수한 순례운동과
동방의 기독교인의 해방이라는 거창한 명제 하에
돌맹이와 낫을 들고 시작하였기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께서 도와주실 것인데 총칼이 왜 꼭 필요하다냐??

이러한 숭고한 마음도 막상 전쟁에서 주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져서 떼거리로 살육당하고 도망쳐 살아남은 자들이 먹을 것 없이 굶주리게 되면 인간의 야수성이 드러나는 법

- 십자군은 돈 많은 유대인들에게 돈을 구해 여비를 충당하고자 하였으나 당연히 거절되었다.
하여 십자군은 엉뚱하게도 유대인을 공격하여 약탈과 살육도 하였음.
“느덜은 그리스도를 죽인 후손이 아니더냐??
이제는 우리마저 굶어 죽게 만드는구나~~~~내가 죽느니 니가 죽는 것이 낫다~~~“하면서??~~@@
교황과 해당 지역의 주교들은 이러한 작태를 파문벌로 다스렸으나 이들의 난동은 막아내지를 못했음.
주교관으로 피신한 유대인들을 쫓아온 패배하여 도망쳐나온 십자군의 일부들은 주교관을 유린하면서 교회에 대해서도
만행을 저질렀음.

- 이에 대하여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주동자를 파문의 벌로 다스렸으며 또한 무고한 백성을 약탈하거나 살육하는 것을 엄격히 명령한다는 칙서를 발표.

7) 십자군 운동은 초기부터 성공하여 예루살렘과 주변에 십자군 국가를 설립하여 192년간이나 지속하였으며 순례자들을 돕고 전쟁 중에는 부상자들을 구호하였음...

이때 생겨난 기사단이 구호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이었는데
이 두 기사단은 경쟁관계에 있었기에
십자군 국가가 유지하는 동안 서로 결합하기도 분열하기도 하면서 존속하였음. 이 기사단들은 처음에는 모두 구호를 위해 설립된 것이지만 후에 기사단으로 변형하였으며
이슬람과의 전쟁도 작전을 세우면서 수행하였으나 서로 견해를 달리하여 성지의 십자군 국가에 막대한 피를 입히기도 하였음. 결국 십자군 국가의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함.

이집트와 시리아, 아라비아등지의 이슬람의 세력이 서로 단결할 때에는 십자군 국가들은 분열하였고 이슬람 국가들이 왕위 계승 등으로 분열할 때에는 십자군 국가들이 단결을 하여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이들 예루살렘을 포함한 인근의 십자군 국가들이 결국 망한 것은 내부 분열 때문이었음.

프랑스는
십자군 운동의 강력한 축이었으나 나중에는(1500년대 전후) 오히려 이슬람과 동맹을 맺어 십자군으로 수행하는 국가들의 전투를 소 닭 보듯 하였으므로 십자군 국가들이 이슬람에 패하여 소멸되는데 지대한 공로?가 되기도 하였다.

8) 십자군에 참여한 나라들은 북 유럽도 참가하여 도움을 주기도 하였으나 총지휘관이 없는 관계로 다시 철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십자군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동기에서 모두 시작되었음.
이들은 모두가 성묘성당 참배를 선서하였기에 이들이나 특히 그룹을 이끌고 참여한 왕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유럽 역시 당대의 정치 상황은 프랑스 영국의 100년 전쟁 기간 중이었으며,
또한 프랑스와 이태리 베네치아 공국간의 불화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십자군 국가가 이슬람의 세력으로 공격을 당할 때에는 어려움에 쳐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십자군은 패하여 대규모로 살육을 당함.

9) 또한 프랑스 알비지방에 모여 살던 카타리파 이단들은
“윤회와 영지주의가 가미된 선민사상을 가진 이상한 기독교”를 퍼뜨리고 있었으며 동조자들이 많았음.
이들은 “국가가 필요없다 하고 가톨릭교회를 사탄”으로 주장하는 등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음.
교황은 이들을 회개시키고자 사절을 보냈으나 사절은 피살당함.

프랑스 왕은 교황의 요청으로 인하여 이 사교집단을 개종시키거나 징벌하기로 함.
(여기에서도 프랑스의 “정쟁”이 섞여 있음)
그리하여 드디어 이단을 개종시킬? “알비 십자군”이 형성되어 알비파(카타리파)와 일전을 겨눔.
20년이상이나 전쟁(1208~1229년)이 벌어졌으며, 이 와중에서 알비파를 그냥 지역 사정으로 맹목적으로 따랐던 무지한 신도들은 “시치미 딱 떼고 교회로 복귀”하였고
(당대 유럽의 영지 국가들에서 특정 영지에 속하는 시민들은 자기들 영주의 종교를 그대로 따르게 됨. 하여 알비지방에서 형성된 알비파 이단들은 자의로 타의로 일비파가 되기도 한 것임)

알비파의 열혈당원들은 전투에 져서 죽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세력이 잔존해 남음.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자들이 이들을 모두 가톨릭으로 회개시키기까지 도합 100년이라는 시기가 소요됨.

하여 십자군 운동은 꼭 동방의 이슬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0) 서방의 끝인 이베리아 반도는 몇 개의 소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수백년간 이슬람의 식민지였다.

스페인의 소왕국의 아라곤(반지의 대왕에서 나오는 주인공 아리곤이 아님^^)왕과 이사벨라 여왕은 정력적으로 결혼을 하여 스페인을 통일 시키는 실마리를 풀었고 특히 가톨릭의 여왕이라는 명예까지 소유한 이사벨라 여왕은 아라곤 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요 못된 이슬람 식민통치자들을 스페인 반도에서 영구히 추방“하기로 결심함.
결국 1495년도 전후로 이슬람의 세력을 몰아내고 스페인과 포르트칼는 독립함.
이때부터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영광이 시작될 것임.
스페인의 십자군 운동은 전체 십자군 운동 가운데 가장 성공한 운동이었음.

위에서 언급한 정황 등을 미리 염두에 두고
십자군운동에서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콘스탄티노플 침략에 대하여 요약해 봅니다.

3. <<제4차 십자군,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의 약탈>>

1) 동로마(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교황에게 십자군을 요청하여 자국과 성지안의 기독교도들을 보호해 주고 이슬람의 치략을 막아달라고 하여 십자군이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잔틴(동로마) 황제는
제국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이슬람과 암묵적인 동맹을 맺기도 하여 십자군의 임무 수행에 간혹 혼선을 주기도 하고 따라서 십자군들을 수행하는 유럽의 왕들이나 영주들은 비잔틴 황제에 대하여 악 감정이 간혹 생기기도 함.

2) 또한 십자군을 지휘하는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자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의견이 갈리기도 하여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는데
특히 제4차 십자군 수행에 도움을 주는 댓가로 막대한 돈을 받기로 한 베네치아 공국에
실제로 십자군에게서 돌아간 “빚 대금”은 계약금액에 비하여 아주 소수였다.

- 베네치아국은
자기들에게 건방지게 반기를 들은 자다르(인들)을 쳐서 굴복 시켜준다면
십자군에게서 받을 빚이나 기타 금전의무들을 탕감해 주겠다고 십자군을 꼬득였고
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교황 특사의 엄명 즉
자다르를 공격하면 “파문의 형벌을 내린다”는 경고에도
그동안 십자군 순례에 있어 굶주림과 질병과 빚 독촉에 시달린 온 십자군들은 베네치아 공국과 함께 자다르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승리자로서 자다르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 자다르인들은 자기들은 교황의 지도를 받는 기독교인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성벽에 교황 휘장을 내 걸었으나
십자군들은 자다르를 공격하여 재산을 빼앗아 서로 나누어 가졌음.
이 약탈품의 일부를 베네치아 공국은 배에 실어 가지고 귀국하였음.
이러한 짓으로 인하여 제4차 십자군은 파문을 받았으며
이 소식은 이웃의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저런 못된 것들이 있노??~~@@> 그럼에도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십자군에 대한 나쁜 감정은 크게 가지지 않았음.
- 콘스탄티노플(동로마)의 황제의 아들인 알렉시우스의 사절들이 자다르에 도착하여
자다르에 머무르고 있던 십자군을 찾았다.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아들 알렉시우스는 황제 찬탈자들을 피하여 동로마제국을 탈출하였으니 십자군이 알렉시우스를 무사히 콘스탄티노플에 데려다 주고 황제로 복귀시켜 준다면 동로마 비잔틴전례의 모든 교회를 로마교회와 결속을 더욱 충실히 하도록 해 주겠으며
이 외에도
1 만명의 군사를 붙여주고
성지 십자군국가에 500명이상의 기사를 상주시켜 줄 것이며
은화 20만 마르크를 비용으로 대겠다고 약속하였다.

3) 이러한 제의는 베네치아의 빚 독촉^^과 십자군 수행에 필요한 비용이 없어 간혹 굶주림으로 몸살을 앓았던 십자군에게는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도 4차 십자군의 병사들은 망설였다.
자다르를 공격하였다가 파문을 당하고
어렵사리 용서를 구해 사면을 받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판국인대
혹시 이 일이 때문에 교황님의 노여움을 다시 산다면~~~????

- 병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맺었다.
어차피 성지로의 출발도 계속 지연되고
돈도 없고 배도 고프고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 순례를 이탈하여 남아있는 사람들도 얼마 되지 않고
알렉시우스를 도와주고 돈을 챙긴 뒤
성지로 “얼른” 떠나면 만사 오케이 아니던가?????
“꿩 먹고 알 먹고, 둥지헐어 불을 때니, 그대 좋고 나 좋아 이야말로 장땡이로다??”

- 십자군은
베네치아, 프랑크 군사들과 함께 전진 끝에 콘스탄티노플로 향했으며
그 도시의 북서부에 다 달았다.
그곳에서 알렉시우스를 위하여 공격하였으나 프랑크군은 패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군은 도시 안에까지 진압하였다.
시내로 진압한 베네치아군사들이 방어책으로 인근의 가옥에 불을 질렀는데
이 불은 세찬 바람으로 인하여 도시 전체로 번져갔다.
이러한 사건으로 베네치아 군사들도 할 수 없이 퇴각을 하였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십자군이 도시 전체에 불을 질렀다고 과장되게 알게 되었다.

4) 그 사이에 알렉시우스는 자기가 필요한 돈만 챙긴 뒤에 도망을 쳤고 십자군은 이 사실을 황제의 특사의 전갈을 받고 알게 되었다

- 그러나 알렉시우스는 우여곡절 끝에 자기 아버지와 공동 황제(알렉시우스 4세)로 등극하였다.
알렉시우스 4세는 십자군 덕으로 황제로 되었음을 잘 일고 있었으며,
그것은 십자군과 약속한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며
아직도 자기 세력이 약함을 잘 아는 알렉시우스 4세는 자기의 황제권 유지를 위하여 십자군을 적으로 만들면 안되었으므로 십자군에게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하여 빚을 갚으려는 알렉시우스 4세의 초조한 노력 때문에 이 황제는 시민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그리하여 돈을 갚을 능력은 더욱 되지 못하였다.

- 시간이 흐를수록 십자군들은 굶주림 등에 시달리며 약속한 금액을 내 놓으라고 독촉을 하였고~~~
알렉시우스 황제에 대한 시민들의 원성은 날로 높아갔으며
“세상 최대의 위대한 황제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또한 어울리지도 않은 이 거렁뱅이들로모인 십자군”을 “황제의 도시 밖으로 내 보내라”고 아우성이었다.
황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자기 부하에게 유폐를 당하였고 그 부하가 황제 알렉시우스 5세로 등극되었다.

5) 알렉시우스 4세로부터 받을 돈이 있던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5세에게 알렉시우스 4세를 석방하라고 강요하였으며 이 문제로 결국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 군과 전투를 벌이는 지경까지 갔다.
이러한 전투은 당대 상황과 십자군의 처지에서 본다면 정당한 것이었다.

이제 알렉시우스5세도 모두에게 버림을 받게 되었다.

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플의 고관과 성직자들은 십자군의 보니파체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새 황제의 대관식을 위하여 소피아 대성당 광장에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있다” 했다.
“ 이 새 황제는 이전의 황제들과는 다를 것이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그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전에 프랑크 군사와 베네치아 군사들은 협약을 맺었다
<<이 도시를 함락시키고 난 후
전리품을 챙긴 후
새 황제를 선출하고자 하는.>>
하여 이도시를 싹슬이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 다음에 보니파체는 자기가 황제로 등극하고자 하는 야심도 품었다.

“그런데 무어라?
주어야 할 돈은 한 푼도 주지 않으면서
새 황제 대관을 위해서 시민들이 모였다구?? 축복해 달라구?? 응?? 이것들이~~@@“

6)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십자군과 맥을 같이하는 라틴 민족들은
소피아 대성당 앞에 모인 수많은 군중들에게 맹수처럼 달려갔다
자기들이 한 십자군 선서는 이미 까마득히 잊어버렸으며

그래서 당연한듯~~@@
콘스탄티노플의 궁전에 들어가서 마구 약탈하였으며 더욱이 이 위대한 대성당의 제단까지 모독하였다.
프랑크 군사를 위한 매춘부들이 총대주교 옥좌에 올라가 외설스러운 춤을 추기도 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성묘 성당을 참배한다는 선서의 실천 대신
제국의 위대한 소피아 대성당의 성물과 온갖 보화들을 약탈해 갔다.
비잔틴 도시안의 시민들은 모두 도망을 갔으며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동로마제국의 황제의 도시는 폐허처럼 빈 도시로 되었다.

7) 이 황당한 사실을 들은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특사에게 이런 편지를 써 보냈다.

<<이교도들과 싸우는데 써야 할 칼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칼이 기독교들에게 피를 흘리도록 하였단 말인가?
이자들은 주님도 무시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는 말인가?
남들이 보는 앞에서 간음과 음행을 하고 심지어 수녀까지 더럽혔다--->>

8) 콘스탄티노플의 원로들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그자들은 거짓말쟁이고 사깃꾼들 임이 드러났다
그자들은 대 놓고 그리스도를 능멸하였으며
그자들이 등에 지고 있던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뒤집음으로서 죄를 지었다
약간의 돈에 눈이 뒤집어져 그 자들은 십자가를 짓밟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비잔틴 시민들에게는 두고두고 서방의 교회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의 원천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교황은 이 십자군들을 다시 파문하였다.

9) 이해 5월에 프랑크국과 베네치아 국의 대표자들이 황제를 정하기 위하여 회의를 열었다
선출된 황제는 프랑스 출신의 보두엥이었다.

교황은 이들을 파문에서 사면하여 주었다.
이제 비잔틴 제국은 황제와 프랑그인, 베네치아인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비잔틴 제국은 이렇게 라틴 제국으로 변모하였으며 원래의 비잔틴 제국은 니케아로 망명정부를 형성하였다.
교황은 이 제국을 그리스도교의 지체로서 축복하였다.

10) 1261년 이 라틴비잔틴 제국은 니케아군대에 의하여 무너졌고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은 다시 수복되었으나 콘스탄티노츨의 화려하였던 영광은 다시 재현되지 못하였다.

비잔틴의 백성들은 그날 이후
역사안에서 간간이 서방교회에 대한 서운함이 있어도
교황에 대해서는 언제나 충만한 존경심으로 주일전례 시에 “교황을 위한 기도”를 하여 왔으나 이제는 날강도들에게 강탈당한 자기들의 제국을
자기들을 이슬람에게서 구원해 주겠다던 교황이 오히려 날강도들과 날강도제국으로 되어버린 자기들의 제국을 돌려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축복”을 하자
완전히 교황에게 등을 돌려 버렸다.
비잔틴 시민에게 <적그리스도>로 되어 버린 교황에게 “교황을 위한 기도??”를 말함은 무엇이랴?

비전틴 제국은 십자군의 약탈이 있은 후 제국은 약 200여년을 더 유지하다가 오스만 투르크(터어키)에 멸망당했다. 
 
참고(추가) 2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 십자군에 전쟁을 일으킨데 대하여 사과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제4차 십자군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 교회(오늘날 정교회 본산)가 유린되고 
총대주교좌 성당인 성 소피아 대성당이 신성모독되어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신자들을 처참하게 만든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제국과 교회에 대한 만행 건에 대하여 사과를 한 것임을 밝힙니다.

 

 

사람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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