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공의회의 주요 내용(1) 1차~3차

2008. 4. 2. 23:47복음생각

역대 공의회의 주요 내용(1차~3차)

- 가톨릭 교리의 정립기(325-870) -

○ 공의회는 주교단의 교도권을 단체적으로 행사하는 결정 기구라고 볼 수 있다. 공의회에서는 전세계의 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여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대해 교황과 더불어 일치된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잡는다. 이러한 공의회는 49-50년 사이에 열렸던 예루살렘 사도 회의(사도 15, 1-29)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상황에서 신앙상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 사도 회의를 했듯이,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도 공의회를 소집하여 신앙과 윤리에 관해 일치된 교리를 결정하고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을 지도하고 다스리며 성화하는 교도권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보편 공의회는 21번 열렸다. 최초의 공의회는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이며 가장 최근의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하고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진행되고 폐막되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이다. ○

⊙ 역대 공의회의 과정

역사 안에 이루어졌던 공의회들은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가톨릭 교리의 정립기(1-8회, 325-870), 둘째는 교계 제도의 정립기(9-18회, 1123-1517)이며 셋째는 교회의 쇄신과 적응기(19-21회, 1545-1965)이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시기별로 공의회의 주요 내용을 살펴본다.

공의회의 소집에 있어서 제1차 공의회(325)부터 제8차 공의회(869 -870)까지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페소, 칼체돈 등을 중심으로 반복하여 개최되었다. 이로써 교회의 초기에 신학상의 이견과 문제들이 주로 동방 교회 지역에서 많이 제기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의 의사 결정에 있어서 황제의 권위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동방 지역에서 열린 공의회에 주로 참석한 주교들은 동방 교회 지역의 주교들이었으며, 서방 교회에서는 교황이 보낸 소수의 특사들이 참석하였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신앙적으로 일치해 있었지만 관습과 언어의 차이1)로 인해 여러 가지로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러다가 제8차 공의회(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869-870)때 포시우스 총주교가 파문당하자 동·서방 교회로 분리하게 된다. 1054년의 결정적인 분리 이후 공의회는 주로 서방 교회에서 로마 교황이 소집하고 서방 주교들이 참석하게 되며, 공의회에서 논의된 것은 교회와 속권과의 관계, 교회 내부의 개혁 등이 주로 다루어졌다. 개최 장소는 라테란, 리용, 비엔나, 콘스탄츠, 바젤→페라라→피렌체→로마 바티칸이었다.

10번 개최된 중세 공의회에서는 교회 개혁과 쇄신 측면에서 부분적인 성과가 있었지만 전체적인 개혁에는 미흡하였다. 그래서 교회 개혁에 만족하지 못한 마르틴 루터는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 -1517) 개최 후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 성당 문에 95개조의 선언문을 제시하고 가톨릭과 대항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길을 열었다. 로마 교회는 결국 1545년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교회 전반에 대한 개혁과 쇄신을 감행하고 가톨릭의 정통성에 따라 교리 전반을 체계화하게 되었다. 그후 근대를 거쳐오면서 300여 년 동안 공의회를 개최하지 않다가 로마 바티칸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00년 후인 1962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개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역대 공의회의 주요 결정 사항

제1차 세계 공의회: 제1차 니케아 공의회
(Concilium Nicaenum, Council of Nicea)

개최시기
325. 5. 20 - 6. 25
소집자
콘스탄티누스 황제
당시 교황
실베스텔(재임314-335)

주요 내용:

동방에서는 50-220명 사제가, 서방측에서는 회의를 주재한 호시우스(Hosius)와 2명의 교황 사절, 5명의 주교가 참석하였다. 주로 아리우스 이단 문제를 다루었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였는데 공의회 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되었다. 공의회에서는 두 편의 신경이 제출되었는데 아리우스파 사람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of Nicomedia)가 제출한 것은 폐기되었다. 그리고 팔레스티나 공동체의 세례 신경을 기초로 성부와 성자는 '동일 본질'(homoousius)이라는 용어를 보완해서 제출한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of Caesarea)의 신경을 채택하여 니케아 신경으로 공포하였다.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는 파문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오(Athanasius) 부제가 정통 교리 수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제2차 세계 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Concilium Constantinopolitanum, Council of Constantinople) 개최 시기
381. 5-7

소집자
테오도시우스 황제
당시 교황
다마소 1세(재위 366-384)

주요 내용:

니케아 공의회 이후 지속되어 오던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 사이의 신학 논쟁을, 특히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대로 재확인하였으며, 성령의 신성을 정의하였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리시오(Melitius)의 주재로 150명의 정통파와 36명의 이단 주교들이 참가하였다. 서로마 제국의 주교나 교황 대사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이 공의회를 두 교회에서 인정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옹호하고 이를 약화시키는 아폴리나리즘(Apollinarism)을 배격하였다. 아폴리나리즘이란 라오디체아(Laodicea)의 주교 아폴리나리우스의 이름을 딴 것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옹호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를 수용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전해지는 신경은 이 공의회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제3차 세계 공의회: 에페소 공의회
(Concilium Ephesinum, Council of Ephesus)

개최 시기
431. 6. 22 - 7. 17(5차례 회의)
소집자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당시 교황
첼레스티노 1세(재위 422-432)

주요 내용:
네스토리우파에 대한 이단 선언.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θεο τοκοs)이라 칭하였다.

네스토리우스(?-451)는 안티오키아 출신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다. 그는 강생한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서로 분리된 인격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는 그리스도를 신(神)이자 인간(人間)인 하나의 인격으로 보는 정통 교리에 배치되었다.

네스토리우스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이 인솔하는 시리아 주교와 교황 성 첼레스티노 1세의 대표들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가 회의를 개막하였다. 그리고 그의 교구인 콘스탄티노플 교구장직에서 네스토리우스를 해임, 파문시켰으며 그의 교리를 단죄하고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이는 에페소의 주교 멤논(Memnon)의 지지를 받았으나 네스토리우스파 사람들이 도착하여 그 사실을 알고 항의했으며, 그들도 회의를 열어 다시 치릴로와 멤논을 파문하였다. 그러다가 2년 뒤 433년에 네스토리우스파의 요한과 멤논파의 치릴로는 서로 화해하였다.

원천 : http://my.dreamwiz.com/jutkim/history/H-012.html
에서 인용함
사람과 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