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라고
병자성사를 위하여 신부님은 병실안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시고
저희 큰누나와 단 둘이서만 남았을 때 이렇게 질문을 하셨다고 합니다.
“세례를 받은 후 지금까지 평생 동안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성당 안팎에서
온갖 굳은 일 힘든 일들을 마다않고 열성으로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아왔는데,
하느님께서는 자매님에게 다른 사람들처럼 장수를 주시지 않으시고
이렇게 빨리 자매님을 하느님의 품으로 데려 가시는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 부모님 슬하에는 6남 3녀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중 8번째로 5남입니다.
외할머니나 이모들이 어머니가 저를 낳으신 후
그만 아기를 낳으라 하여 제 이름이 (막)동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시 아들을 하나 더 낳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막)동이란 제 이름은 좀 더 오래 갔습니다.
당시 저희 집안 특별히 종교라고는 없었으나 어머니는 절에도 다니셨고 점집에도 다니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중학교 1학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은 후에 큰누나가 세례를 받게 되었고
큰누나가 세례를 받고나서부터 온 가족이 서서이 모두 하느님 품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우선 어머니가 뒤를 이었고 다음에는 아버지가 동생이 형이 둘째누나 셋째누나가
그리고 형수들이 조카들이 계속하여 세례를 받게 되어 명실공히 주님 포도원의 포도나무 가지들이 되었습니다.
큰누나는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남에게 질 일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만 있다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일 겁니다.
또한 봉사하기 위하여 알아야 하겠기에 교리공부 성경공부 등등도 남달리 열심히 익혔습니다.
이런 누나의 열성을 지켜보시던 주임신부님께서 당신 조카를 넌지시 신랑감으로 추천하셨습니다.
신랑은 누나가 보기에 여러 조건으로 (최)고급품에 속하였습니다.
최고급을 좋아하는 우리 누나는 당연히 마다할 리 없어 결혼이 성사되었고
누나는 매형이 살고 있었던 삼청동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혼인미사를 가회동 성당에서 하였는데 30여년이 지나도록 기억이 나는 것은
혼인 미사를 마치고 누나가 웨딩마치에 맞추어 퇴장을 하던 때
성당 2층 성가대에서 성가대원들이 “라우다떼 도미눔(주 찬미하라)”를 힘차게 부르며
동시에 박수를 치면서 오색가지 종이들을 뿌려주던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어린 저였지만 신부(누나)의 그 퇴장 모습은 너무 감동스러웠습니다,
그때부터 누나는 가회동 성당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큰누나는 간혹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싶기도 하였지만 가회동성당과 신자들을 떠날 수 없어
삼청동에서 산다고도 하였습니다.
가회동성당은 누나에게 안식처였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큰누나를 과외공부 선생님으로 삼아 컸습니다.
큰누나가 과외선생으로 계속 영위하려면 제가 공부를 또한 잘하여야만 하였구요.
그래야만 제가 아이들을 꼬득여 누나에게 아이들을 데려오기 쉬웠을테니까요.
공부를 남들보다 잘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큰누나에게 구박을 많이 당해야 하였습니다.
이런 큰 누나가 미워 죽을 뻔하였던 때가 아마도 한두번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큰누나는 이렇게 하여야만 당시 가족에게 나름대로 봉사할 수 있기도
또한 자신의 등록금도 감당하기도 하였을 겁니다.
큰누나는 어떤 면에서 우리 집 기둥이기도 하였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모였을 때 큰누나가 없을 때는 가족들의 모임이 그다지 흥이 나질 않았습니다.
큰누나가 있을 때에야 분위기가 비로서 시끌벅적해지면서 흥겨워졌습니다.
더욱이 가족들이 모두 술로 얼굴이 벌개지기 시작할 때 시작되는 가족 콩쿨대회 때에는
자기가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줄 아는지 아파트 아래 윗 층 눈치코치 보질 않고 율동까지 더불어 분위기를 잡으며 더욱이 “자매 뚜엣” 혹은 “자매 트리오”를 즉석에서 결성하여 마이크를 독차지 하여도 아무도 지겨워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던 큰누나는 10여년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었고 그로인해 그 예쁜 자태 중 일부가 망가졌습니다.
그때 가졌을 듯 한 큰누나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던지말던지 유방암 수술은 잘 마무리되어 그 이후 일 년에 한 두차례 정기검사만 받고 지냈습니다.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큰누나는 쾌활한 성격을 버리지 않았고 더욱 더 교회활동에 매진하였습니다.
정기적으로 가족들이 모일 때에는 콩쿨대회를 열어 자신이 여전히 잘났음을 과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난해는 여러 가지로 힘든 해였습니다.
큰 누나에게 폐암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지지난해 말에 전해졌습니다. 말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제 경험에 비추어 “그것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저는 마음에 크게 두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건강도 눈에 띄게 약해져 갔습니다. 심지어 지난해 말 아버지가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가족들은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런지 몰랐지만
큰누나가 저희 본당에 전화를 하여 아버지 병자성사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달려와 아버지의 병자성사를 함께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일주일을 넘기시지 못하고 하느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아버지의 병자성사 후
큰누나는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그 이후 부터는 아버지 병실에 들리지도 못하였으며
아버지의 장례미사 때에도 큰누나는 나타나질 못하였습니다.
아버지가 하느님의 품으로 떠나신 후 꼭 33일 만에
큰누나도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가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품에 안겼습니다.
장례미사를 집전하시는 신부님께서 계속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자매님은 하느님을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부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는데요?
하느님께서 오히려 교만하였던 저를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회동 성당을 가득 메운 신자들이 저희 가족들 보다 더 슬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30여년을 서울 한 모퉁이의 작은 마을에서 교우들이 서로 친척처럼 친구로서 성당을 중심으로 함께 살아와서 그런지
큰누나를 떠나보내는 교우들은 모두가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으며 천국에서 다시 만날 희망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마음껏 슬퍼하였습니다.
제가 함께 기뻐하고 살아왔던 사람들 한 분 두 분 떠나갑니다.
살아서는 이승에서 하느님 안에서
죽어서는 광명의 나라인 하느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며 사는 삶을 그리워하며
저도 언제던 떠나야 할 차비를 단단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가 가회동 성당에 처음 왔다가 나설 때에 성당 2층 성가대의 혼인미사 특별성가로 “라우다떼 도미눔”을 들었습니다.
제가 두 번째로 장례미사를 위하여 가회동 성당에 왔다가 나설 때에 2층 성가대의 고인에 대한 고별 성가로
<야훼는 나의 목자>를 누나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으로 모두가 눈물바다로 된 성당 안에서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질병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하느님을 잊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한평생 생을 살다가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우리 큰누나는
자신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가슴에 길이 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큰누나에게 영원한 빛을 비쳐주시길 빕니다.
또한 마지막 날엔 큰누나의 그 예쁜 모습을 다시 살려주시길 빕니다.
우리 주님
어서 빨리 오소서. 아멘.
PS: 큰누나 기일 즈음에 큰누나를 생각하며...
사람과 자연